처음엔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뒷산에서 등산하다 흙바닥에 두 번이나 구르고 돌아온 날, 심야 상영이라 끝나면 택시까지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 관람평엔 '지루하다'는 말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예고편 속 자자 코다의 대사 하나가 저를 결국 극장으로 이끌었습니다.
여권도 없는 남자를 영화관으로 끌어당긴 한 마디
"난 어딘가의 시민도 아니고, 내 인권이 필요치 않아." 예고편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뭔가 묘하게 걸렸습니다. 단순한 허세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자자 코다가 '인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독특했는데, 약자가 스스로의 행동 선택권을 국가에 위임하고 그 대가로 얻는 것이 기본권이라는 뉘앙스였습니다. 자신은 그걸 어딘가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추구하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의미로 들렸거든요. 이 대사 하나가 냉혈한 거물 사업가의 세계관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제 경험상 판단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예고편 배경음악이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프롬나드였습니다. 여기서 프롬나드(Promenade)란 원래 전시장을 거니는 모습을 묘사한 피아노 조곡의 도입부로, 임윤찬 덕분에 알게 된 후 즐겨 듣던 곡이었습니다. 그 이틀 뒤엔 파리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직관도 예정되어 있었으니, 이쯤 되면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장르, 미장센으로 말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장르를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페니키안 스킴도 첩보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알던 첩보물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습니다. 영화 자체의 장르 분류보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장르처럼 기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그니처인 미장센(Mise-en-scène) 때문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색채, 소품, 구도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핑크와 보라,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사막빛 하늘색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파스텔 톤의 색채 팔레트와 완벽한 좌우 대칭 구도가 화면 전체를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처음 봤을 때 스토리보다 화면 구성에 먼저 빠졌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 경험이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연출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독특한 화면 비율(아스펙트 레이시오)로 장면마다 다른 시간감을 부여
- 등장인물의 과장된 신체 연기와 무성영화적 유머 코드
- 파스텔 색채 팔레트를 기반으로 한 일관된 세계관 구축
- 좌우 완벽 대칭 구도를 통한 강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화면 설계
여기서 아스펙트 레이시오(Aspect Ratio)란 화면의 가로 대 세로 비율을 의미하는 용어로, 웨스 앤더슨은 이를 장면마다 의도적으로 변환해 관객에게 시간과 공간의 층위를 구분하는 장치로 사용합니다. 이 편집증적인 구도와 미장센 덕분에 스토리 흐름을 놓치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이미 절반은 건진다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냉혈한 부녀, 예상 밖의 가족영화
보기 전에 '웨스 앤더슨의 첩보 스릴러'라는 수식어를 들었던 탓에 장르적 긴장감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실상은 가족영화에 훨씬 가까웠습니다. 블랙 코미디를 곁들인 부녀 관계의 이야기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딸 리즐의 설정이었습니다. 수련수녀로 등장하는 리즐은 처음엔 신실하고 온화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극 중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지는 자자보다도 감정의 표출이 적습니다. 영화는 리즐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감정 결핍을 극복하고자 수녀의 길을 선택했음을 살짝 암시합니다. 제가 주목한 건 이 지점이었는데, 리즐이 소시오패시(Sociopathy)적 면모를 스스로 자각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는 설정이 꽤 깊이 있게 느껴졌습니다. 소시오패시란 반사회적 성격 장애 중 하나로, 공감 능력의 결여와 타인을 도구화하는 성향을 특징으로 합니다(출처: 미국정신의학회 DSM-5 진단기준).
사실 리즐은 자자의 친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코다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형제 갈등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두 사람의 유대는, 혈연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냉혈한이 수녀 딸에게 감화되어 결국 동네 식당 주방장으로 살아가는 결말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고, 그 뻔하지 않음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루하다는 평 앞에서, 실제로 겪어보니 달랐습니다
보러 가기 전 관람 후기에서 가장 많이 본 단어가 '지루하다'였습니다. 솔직히 그게 가장 큰 망설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난 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영화의 템포가 굉장히 빠르고 씬 전환도 스펙타큘러한 편이라, 화장실을 가려다 되돌아온 입장에서 이게 어떻게 지루할 수 있는지 순수하게 의문스러웠습니다. 관객이 저 혼자였던 덕에 거의 안방에서 보듯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있겠지만요.
다만 웨스 앤더슨 영화가 대중적이지 않다는 건 인정합니다.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 자체의 서사 구조와 감정적 흐름을 중심으로 영화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분절된 씬 구성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장센과 시각 언어에 민감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프레임 하나하나가 선물처럼 느껴질 겁니다.
캐스팅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데, 미아 트리플턴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3월에 본 브루탈리스트의 조피아 배우와 겹쳐 보여 같은 사람인가 하고 뒤늦게 검색해봤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었고, 케이트 윈슬렛의 딸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목소리도 매력적이고 감정 표현이 깜찍하게 절제되어 있어서 리즐이라는 캐릭터를 정확히 짚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비평 전문 매체 로저 에버트닷컴은 웨스 앤더슨 특유의 배우 활용 방식이 배우 개인의 개성을 작품 안에 완전히 흡수시킨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출처: RogerEbert.com).
피곤한 몸으로 심야 영화관에 앉아 택시비까지 각오하고 본 선택이 후회스럽지 않았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세계를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이번 영화가 꽤 좋은 입문작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단, 이야기보다 화면을 즐길 준비를 하고 가시는 편이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저처럼 예고편 속 대사 하나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예상 밖의 따뜻한 결말에 마음이 풀리는 경험, 한 번쯤 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