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랑은 정말 끝난 걸까요. 넷플릭스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여성과 초상화 화가 사이에 피어난 사랑 이야기인데, 단순한 퀴어 로맨스로 분류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시선의 윤리 — 본다는 것은 권력인가, 책임인가
보는 내내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은 이거였습니다. 마리안느는 처음부터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합니다. 의뢰를 받아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지만, 정작 엘로이즈는 자신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역시 프랑스 영화는 프랑스 영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 장면 하나에 이미 권력 관계가 촘촘하게 깔려 있었거든요.
여기서 영화가 끌어오는 개념이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입니다. 대상관계이론이란 인간이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내면화하는가를 다루는 심리학 이론으로, 우리가 맺는 관계의 질은 상대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봅니다. 마리안느의 시선은 처음에 일방적입니다. 그녀가 보고, 해석하고, 그림으로 규정합니다. 그 구조는 화가와 모델이라는 역할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만, 동시에 윤리적으로 불편합니다.
그런데 엘로이즈가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보고 있나요, 아니면 기억하고 있나요." 제가 이 대사에서 멈칫했던 건, 그것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시선의 방향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라보던 자가 바라보이는 자가 되고, 권력이었던 시선이 책임으로 전환됩니다.
시선이 책임으로 이동하는 이 구조는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성(Alterity) 개념이란 타인을 내 인식의 틀로 환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마주할 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시작된다는 사유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엘로이즈의 질문은 마리안느에게 정확히 그 전환을 요구합니다.
영화에 음악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처음엔 의아했는데, 관람 후 이 선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장작이 타는 소리,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감정을 대신합니다. 음악으로 감정을 주입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시선 하나하나가 더 또렷하게 살아났습니다.
- 마리안느의 초기 시선 → 권력이자 일방적 해석의 도구
- 엘로이즈의 반문 → 시선을 책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계기
- 대상관계이론 관점 →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관계의 질을 결정
- 음악 부재 → 시선과 소리로 감정을 대체하는 연출 선택
선택과 책임 — 자유는 왜 지속되지 않는가
엘로이즈의 성격에 저는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같이 본 사람들은 마리안느가 더 좋았다고 했지만, 엘로이즈의 주체적이고 솔직한 태도가 18세기 여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녀는 예정된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말로 꺼냅니다. 그 귀엽고도 단단한 성격에 엄청나게 반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자유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이었습니다. 엘로이즈에게는 결혼이라는 구조가 감정보다 앞서 존재합니다. 이 지점이 단순한 시대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 질문이 됩니다. 과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가.
여기서 영화가 건드리는 개념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입니다. 인지부조화란 개인의 감정이나 신념과 외부 현실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일치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원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어긋날 때 인간이 겪는 내면의 갈등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모두 이 불일치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합니다. 한쪽은 그림으로, 다른 쪽은 기억으로.
오르페우스 신화를 해석하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는 행위를 '실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읽는 엘로이즈의 해석이 정확히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엘로이즈 초상화의 28페이지를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감독이 오르페우스 신화를 극 전반에 걸쳐 깔아두었다는 걸 그 장면에서 확인한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소피의 낙태 장면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선택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경험을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이미지로 남깁니다. 이것은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 이론과 연결됩니다. 내러티브 정체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개념입니다. 이 영화의 세 여성은 사회가 지워버리려는 경험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되살려냅니다. 그 선택이 얼마나 급진적인지는, 18세기라는 배경을 놓고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극에 남성 주조연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소피의 서사를 꾸준히 이어간다는 사실은 퀴어 영화라는 분류를 훌쩍 뛰어넘는 지점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세 여성의 연대와 각자의 선택이 하나의 축으로 맞물리는 구조가 이렇게 정교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에 흐르는 비발디 『사계 — 여름』이 그 모든 감정을 현재로 불러올 때, 제 경험상 이 정도 여운을 주는 엔딩은 흔치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퀴어 영화로 봐도 되나요?
A. 퀴어 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 범주에 가두기엔 아깝습니다. 두 여성의 사랑을 중심에 두면서도 계급, 젠더 권력, 여성 연대, 예술의 윤리까지 다루는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퀴어 서사보다 '시선과 책임'이라는 철학적 질문이 훨씬 강하게 남았습니다.
Q. 영화에 음악이 거의 없는 이유가 뭔가요?
A. 감독 셀린 시아마의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음악으로 감정을 유도하는 대신, 장작 소리·연필 소리·파도 소리가 감정을 대신합니다. 처음엔 저도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나중에 보니 그 고요함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훨씬 선명하게 살려주더라고요. 마지막 비발디 『사계 — 여름』이 그래서 더 강하게 터집니다.
Q. 오르페우스 신화가 왜 중요한가요?
A.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장치입니다.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행위를 '실수'가 아닌 '시인의 선택'으로 해석합니다. 사랑을 잃는 선택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을 예술로 완성하는 선택이라는 거죠. 제 경험상 이 해석 하나로 영화 전반의 선택들이 다 다시 읽히는 느낌이었습니다.
Q. 소피 캐릭터는 왜 중요한가요?
A.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서 자칫 배경으로 밀릴 수 있는 소피가 자신만의 서사를 꾸준히 이어간다는 점이 이 영화를 다르게 만듭니다. 소피의 낙태 경험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장면은 계급과 젠더를 동시에 건드립니다. 세 여성 각자가 '남겨짐'을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가 매우 정교합니다.
결론
정리하면, 이 영화는 사랑이 자유인가 책임인가를 묻고, 그 답을 말 대신 시선과 이미지와 소리로 남깁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남았는가입니다. 마리안느에게는 그림으로, 엘로이즈에게는 음악을 듣는 표정으로, 소피에게는 재현된 장면으로. 각자 다른 형태로 살아남습니다.
퀴어 영화에 거리감이 있는 분도, 프랑스 영화의 은유적 표현이 낯선 분도 한 번은 도전해볼 만한 작품입니다. 저는 은유들이 많아서 보는 내내 집중하기 쉽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관람 후에도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라는 대사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바로 볼 수 있으니, 조용한 밤에 혼자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