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예고편을 보고 "이거 좀 다르겠다" 싶었던 적 있으시죠? 저는 히든페이스가 딱 그랬습니다. 콜롬비아 원작 스릴러를 한국판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예상했던 것과는 꽤 다른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욕망 서사 — 치정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시작부터 솔직히 말씀드리면, 초반 30분은 흔한 불륜 서사처럼 보였습니다. 지휘자 성진(송승헌)이 약혼녀 수연(조여정)을 잃은 뒤 그녀의 빈자리를 채운 첼리스트 미주(박지현)에게 끌리는 구도, 이건 한국 멜로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봐온 전개입니다. 치정물이란 사랑과 욕망이 뒤엉켜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 구조를 말하는데, 영화는 처음에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중반부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원작에 없던 설정이 투입되면서 영화는 단순한 치정 구도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합니다. 저는 이 변화구를 꽤 흥미롭게 봤습니다. 철없는 부잣집 딸처럼 보이는 수연, 성공 앞에 가난 콤플렉스를 숨긴 것처럼 보이는 성진, 그리고 제3의 욕망을 품고 있는 미주. 이 세 인물이 단순히 '사랑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각자 다른 결핍을 추구한다는 점이 영화를 붙들어두는 힘이었습니다.
영화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내러티브 아크란 인물이 욕망을 품고, 갈등을 겪고, 변화하거나 파국을 맞는 일련의 이야기 곡선을 뜻합니다. 히든페이스는 이 아크를 세 인물에게 동시에 부여하려 했고, 그 시도 자체는 제가 보기엔 꽤 야심찬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가 분석한 국내 상업영화 흥행 요인 연구에 따르면, 복수의 주인공 서사는 러닝타임 분배 실패 시 관객 이탈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히든페이스가 딱 이 함정에 발을 걸친 느낌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흥미를 놓지 않았던 이유를 꼽으라면, 솔직히 거의 전적으로 박지현과 조여정의 서사 덕분이었습니다. 성진의 감정 변화에는 크게 이입이 되지 않았고, 그의 흔들림과 선택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너무 빠르게 처리되어 얼렁뚱땅 마무리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반면 박지현 배우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분한 욕망을 눈빛 하나로 표현해냈고, 그 연기가 영화를 진짜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반 치정물 구도에서 중반 이후 원작에 없는 설정으로 장르적 변화를 시도
- 세 인물이 각기 다른 욕망을 추구하는 다층 서사 구조
- 성진(송승헌) 캐릭터의 감정선이 후반 급히 처리되어 이입 약화
- 박지현·조여정의 열연이 영화 전체의 무게 중심을 지탱
밀실 스릴러 — 갇힌 사람을 보면서 왜 안타깝지 않았을까
밀실 스릴러(Locked Room Thriller)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인물이 외부의 상황을 관찰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며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장르 공식입니다. 쉽게 말해 관객도 함께 그 방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과 공포를 느끼도록 설계된 구조입니다. 원작 콜롬비아 영화 '라 카라 오쿨타(La Cara Oculta, 2011)'가 바로 이 공식을 충실하게 밟아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밀실에 갇힌 수연을 보며 왜 그다지 안타깝거나 답답하지 않았는지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이상한 반응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수연이 밀실 안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장면들이 공포보다는 관음(Voyeurism) 서사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관음 서사란 숨어서 타인의 행위를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긴장감 대신 욕망의 시선을 강조하는 이야기 장치를 말합니다. 영화가 수연의 감정을 공포로 정렬하지 않고 욕망과 애증의 시선으로 틀어버린 것이죠.
이 선택이 흥행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대해서는 판단이 갈릴 수 있습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데이터를 보면 국내 개봉 스릴러 장르의 최근 5년 누적 관객 추이에서 심리 서스펜스보다 욕망·관계 중심 서사가 20·30대 여성 관객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재관람 의향을 보이는 경향이 확인됩니다(출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히든페이스가 그 층을 노렸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밀실 공간을 활용하는 아이디어 자체는 원작보다 훨씬 덜 날카로웠습니다. 수연이 밀실 안에서 분노나 공포를 표출하거나, 두 사람의 행위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 장치가 있었더라면 스릴러로서의 밀도가 훨씬 높아졌을 텐데, 그 부분에서 아이디어가 고갈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밀실을 스릴의 도구로 쓰기보다는 욕망을 바라보는 프레임으로 활용하는 쪽을 택했고, 이것이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여정 배우의 캐릭터 소화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과하다 싶은 장면들도 있었지만, 각 인물이 공통적으로 깔고 있는 욕망의 결을 이해하고 나면 그 과함이 오히려 캐릭터의 논리 안에서 납득되기도 했습니다. 송승헌 배우는 개인적으로 발음 전달이 아쉬웠고, 일부 대사는 자막 없이는 잘 들리지 않아 몰입을 끊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결국 히든페이스는 원작의 스릴러 문법을 기대하고 간다면 분명 아쉬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세 인물의 각도로 풀어내려 했던 시도, 그리고 박지현이라는 배우를 재발견하게 해준 점은 충분히 가치 있었습니다. 천천히 이끌다 황급히 끝내버리는 결말이 못내 아쉽지만, 관람을 고민 중이시라면 스릴러보다는 욕망의 심리극으로 접근해보시길 권합니다. 그쪽으로 기대치를 조정하면 꽤 다른 감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