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아노라가 상위권에 오르면서 "이게 그 아카데미 작품상 영화야?" 하고 궁금해진 분들 꽤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아카데미 5관왕이라는 수상 이력만 믿고 틀었다가, 초반 20분쯤에서 멈칫했던 게 솔직한 첫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두고 "시상식용 작품이라 일반 관객에겐 안 맞는다"는 시각도 있고, "오히려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의견도 있는데, 제가 실제로 끝까지 본 입장에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신데렐라 서사와 블랙코미디 사이
영화 초반은 누가 봐도 로맨틱 코미디 문법을 따라갑니다. 뉴욕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아노라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즉흥 결혼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인 귀여운 여인과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여기서 신데렐라 서사란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신분이 상승하는 플롯 공식을 가리키는데, 이 영화는 그 공식을 정확히 흉내 낸 뒤 의도적으로 깨뜨립니다.
문제는 그 공식이 깨지는 방식이 꽤 불친절하다는 겁니다. 이반의 부모가 결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수인들이 등장하고, 이후 영화는 소동극(farce) 장르로 급전환합니다. 소동극이란 과장된 오해와 혼란이 연속으로 쌓이며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 형식인데, 여기서 문제는 그 웃음이 마냥 가볍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던 건, 오디오가 겹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장면들이 반복될 때 코미디보다는 스트레스 지수가 먼저 올라갔다는 겁니다. "내가 왜 이걸 계속 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이 불쾌함이 어느 순간부터 의도된 것임을 알아채게 됩니다. 하수인 토로스, 가닉, 이고르는 처음엔 무서운 해결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자 한 명을 제어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걸 두고 "단순히 코미디 효과를 위한 캐릭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들 모두 결국은 더 높은 권력에 종속된 노동자입니다. 특히 이고르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투입된 인물로, 하청의 하청 구조를 그대로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아노라가 어떤 관객에게 맞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같은 전작을 인상 깊게 본 관객
- 로맨틱 코미디 형식을 비틀어 계급과 권력을 다루는 드라마를 원하는 분
- 마이키 매디슨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처음 확인하고 싶은 분
- 반대로 자극적인 장면과 소란스러운 전개를 불편해하는 분께는 추천이 어렵습니다
계급과 아노라라는 인물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유를 따질 때, 아카데미 작품상(Academy Award for Best Picture)이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해당 연도 최고의 영화에 수여하는 상으로, 영화 산업 전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입니다. 수상 기준이 단순한 흥행이나 대중성이 아닌 만큼, 이 영화가 왜 거기서 선택받았는지를 이해하려면 아노라라는 인물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출처: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영화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건 계급적 위계 구조입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민자 출신이거나 이민자 가정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르메니아계인 토로스와 러시아계인 이반 모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처지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충동적으로 결혼을 결정하는 이반의 행동도 그 맥락에서 보면 단순한 철없는 재벌 2세의 일탈이 아닙니다. 비자 문제로 체류 자격이 불안정한 이민자가 겪는 법적 제약을 우회하려는 시도인 셈입니다.
아노라 역시 그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정확히 부르지 않으면 분노하면서도, 이고르에게는 거침없이 막말을 던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오히려 이 인물을 훨씬 현실적으로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완벽한 피해자도, 일관된 강자도 아닌 사람. 그게 이 영화가 아노라를 소비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는 이 복잡한 결을 실제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합니다. 영화비평 집계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이 영화는 비평가 지수 95% 이상을 기록했는데, 그 평점을 견인한 핵심이 바로 그녀의 퍼포먼스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저도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쌓이는 방식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가 꽤 어려웠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결말에 대해서는 관객마다 해석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체념"으로 읽는 분도 있고, "치유의 시작"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늘 대가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해온 사람이 처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시선을 경험하는 장면으로 읽혔습니다.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노라는 처음엔 분명 불편하고 정신없는 영화입니다. 초반 빌드업이 길고, 소동극 구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관객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중후반 이후 이 모든 설정이 철저히 의도된 것임을 알아채는 순간부터 영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틀기보다는, 계급과 노동이라는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훨씬 많은 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