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비라는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걸, 영화를 보기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2022년 개봉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영화 스펜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건, 단순히 슬퍼서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정말 이 배우가 맞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그동안 과소평가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처음 얼굴을 알린 뒤로 퍼스널 쇼퍼, 언더워터 같은 작품들을 거쳤지만, 연기보다는 외모 중심으로 소비되는 배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스펜서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모사(模寫), 즉 유명인을 흉내 내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모사란 외형적 특징이나 말투만 따라 하는 피상적 연기를 뜻하는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의 내면 감정 자체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이애나가 느꼈을 우울, 불안, 압박감, 그리고 아주 짧게 스치는 해방감까지 얼굴 하나로 다 표현해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를 잘한다"가 아니라, "저기 다이애나가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직접 보셔야 압니다.
조연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샐리 호킨스, 숀 해리스 등 작품을 구성하는 배우들이 하나같이 캐릭터와 일체화된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 전체의 공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주연이 아무리 빛나도 조연이 받쳐주지 못하면 영화는 무너지는 법인데, 이 작품은 그 균형이 매우 탄탄했습니다.
연출이 만들어낸 답답함,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유독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내용이 슬퍼서가 아니었습니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 감각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 기법 중 하나가 클로즈업(close-up)입니다. 클로즈업이란 피사체, 특히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화면 가득 채워 담는 촬영 기법으로,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스펜서에서는 다이애나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으로 잡습니다. 배경의 화려한 왕실 공간은 의도적으로 밀려나고, 대신 그녀의 굳어있는 표정, 눈빛,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화면을 채웁니다. 그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의상 연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몸을 꽉 조이는 코르셋(corset) 구조의 왕실 예복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코르셋이란 몸의 실루엣을 잡기 위해 신체를 압박하는 형태의 의상 구조를 말합니다. 그 의상을 입은 다이애나의 표정에는 말 그대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담겨 있었습니다. 화려한 드레스가 감옥처럼 보이는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제가 그 장면들에서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쉬었을 정도입니다.
차(車)라는 소재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질 줄이야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사실 특정 장면이 아니라 '차'라는 소재의 반복적 등장이었습니다. 이게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엔딩을 보고 나서야 감독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한 영화인지 실감했습니다.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영화 오프닝부터 차가 등장하고 다이애나와 차가 함께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것이 단순한 연출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감독은 차라는 소재를 통해 그녀의 운명을 암시하는 동시에, 엔딩에서는 그 소재를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이애나는 두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납니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요. 그녀의 삶을 앗아간 바로 그 차가, 마지막에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바뀌는 겁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감독이 그녀에게 보내는 일종의 추모이자 위로라고 느꼈습니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에게, 영화 안에서만큼은 행복한 결말을 선물한 것이라고요. 이런 상징적 구조를 영화 용어로 모티프(motif)라고 합니다. 모티프란 작품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주제를 강화하는 상징적 요소를 뜻하는데, 스펜서에서 '차'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이 영화, 어떤 분께 추천드릴까요?
영화 스펜서가 모든 분께 맞는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꽤 무겁고, 내러티브(narrative) 전개도 느린 편입니다. 내러티브란 사건의 전개 방식, 즉 이야기가 흘러가는 구조를 뜻하는데, 스펜서는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는 심리 묘사 중심의 영화입니다. 빠른 전개나 명확한 기승전결을 선호하신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잘 맞을 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실화 바탕의 전기 영화, 혹은 심리 드라마를 즐기시는 분
- 영국 왕실의 문화와 예법이 어떤 것인지 시각적으로 경험하고 싶으신 분
- 다이애나 왕세자비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영국 왕실의 역사적 배경을 미리 알고 보시면 훨씬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저는 사전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봐서 놓친 부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보고 나니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영국왕실공식홈페이지(출처: The Royal Family)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 관련 기록을 미리 훑어보고 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또한 영화의 성격상 다소 우울하고 무거운 감정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묘사하는 섭식 장애(eating disorder) 관련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왕실 생활 중 경험한 것으로 알려진 증상입니다. 이와 관련해 정신건강의학계에서는 극도의 스트레스 환경이 섭식 장애의 주요 유발 요인 중 하나임을 지적합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점을 미리 감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좀 더 건강한 상태에서 왕실과 맞서거나 혹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 내내 들었습니다. 그 아쉬움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여운이 되었습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나시는 분이라면, 지금 한 번쯤 이 영화를 꺼내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엔딩 장면을 보고 나면, 저처럼 한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참고: The Royal Family, 국립정신건강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