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TOP10에 올라와 있는 영화를 틀었는데, 10분쯤 지나서 "어? 이거 본 적 있는데?" 싶은 경험, 한 번쯤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는 <메모리>를 보면서 정확히 그 상황을 겪었습니다. 이미 본 영화인데 기억이 흐릿해서 처음 보는 기분으로 다시 앉아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 본 소감을 솔직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기억이 무너지는 킬러라는 설정, 어디까지 통할까
<메모리>는 리암 니슨이 연기하는 킬러 알렉스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 초기 증상을 앓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츠하이머란 뇌의 신경세포가 점차 손상되면서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서서히 소실되는 퇴행성 질환입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킬러라는 조합은 분명 신선합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는 꽤 기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설정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겪는 인지 왜곡이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스크린에 담아낼 수 있는 여지가 분명 있는데, 영화는 그것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표면적인 위기 상황에 머무르는 느낌이었습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의 절박함보다, 그냥 몸이 좀 느린 킬러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알렉스는 아동 학대와 연루된 의뢰를 단칼에 거절하는 인물입니다. 그 거절이 모든 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도덕적 신념을 가진 킬러라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사건을 통해 변화하거나 의지를 완성해가는 서사 구조는 이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공식이기도 합니다. 그 공식 자체가 문제는 아닌데, 이 영화에서는 그 공식을 새롭게 비트는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리암 니슨, 그리고 아쉬운 캐스팅의 무게
리암 니슨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여전히 액션 장르에서 강한 존재감을 가집니다. <테이큰> 시리즈 이후 그가 구축한 스크린 페르소나(persona), 다시 말해 스크린 위에서 관객에게 각인된 이미지와 캐릭터의 총체는 "늙었지만 무서운 남자"로 굳어졌습니다. 그 이미지가 <메모리>에서도 작동하긴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이미지에 너무 기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두 번 보고 느낀 건, 리암 니슨이 연기를 못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 자체가 그에게 충분한 역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이 피어스가 연기하는 FBI 요원 빈센트, 모니카 벨루치가 맡은 인물까지, 이름만으로도 신뢰가 가는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각 캐릭터의 서사가 얇습니다.
국내 영화 분야 연구에서도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 즉 여러 실력파 배우를 고루 배치하는 구성 방식이 흥행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꾸준히 나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배우들의 조합보다 각 인물의 서사적 밀도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메모리>는 그 밀도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메모리>를 고를 때 참고할 핵심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리암 니슨의 분위기와 존재감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볼 만합니다.
- 탄탄한 서사와 캐릭터의 심리적 깊이를 원한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합니다.
- 강렬한 액션 카타르시스보다는 느리고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입니다.
마틴 캠벨 감독의 연출, 기대와 현실의 간극
<007 카지노 로얄>을 연출한 마틴 캠벨 감독이라는 사실은 분명 기대치를 끌어올리는 요소입니다. <카지노 로얄>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니었습니다. 인물의 내면과 첩보 스릴러의 긴장감을 함께 붙잡는 연출이었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같은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메모리>는 그 긴장감이 훨씬 약했습니다.
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색감 등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뜻합니다. <메모리>의 멕시코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한 화면은 색감이나 공간감 면에서 분명 공을 들인 흔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사의 긴장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배경은 거칠고 음산한데, 그 배경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의외로 밋밋하게 처리됩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사건이 배열되고 전개되는 방식도 문제입니다. 초반부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집 안에서 어린 딸이 다른 방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장면인데, 저는 그 장면에서 이미 봤던 기억이 확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임팩트가 여기가 전부구나" 싶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영화의 에너지가 중반 이후로 갈수록 흩어지는 구조였습니다.
넷플릭스 TOP10의 함정, 어떻게 고를 것인가
넷플릭스 TOP10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곧 '재미있는 영화'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스트리밍 플랫폼 연구에 따르면, TOP10 순위는 시청 시작 횟수에 기반한 알고리즘의 결과물이며 시청 완료율이나 만족도와는 별개로 산출됩니다(출처: Netflix Investor Relations). 한마디로 제목이 궁금해서 클릭한 것만으로도 순위에 반영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메모리>가 TOP10에 진입한 것도 리암 니슨이라는 이름값과 넷플릭스 추천 알고리즘의 힘이 컸을 겁니다. 제가 직접 클릭해서 봤고, 심지어 두 번이나 봤으니 저도 그 통계에 기여한 셈이겠죠. 두 번 봐도 크게 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그 점이 이 영화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혀 볼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리암 니슨 특유의 지쳐가는 노장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들, 빠른 전개보다 느리고 묵직한 톤을 선호하는 분들에게는 맞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내려놓고 시작하시는 게 맞습니다.
결국 <메모리>는 좋은 배우들과 흥미로운 소재를 손에 쥐고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영화입니다. 리암 니슨의 팬이라면 가볍게 한 번 틀어보는 것까지는 추천드립니다. 단, 빈센트와 알렉스가 마주치는 후반부에서 사건의 비밀이 드러나는 구조를 기대하고 보셨다면, 그 기대에 온전히 답하는 결말은 아니었다는 점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처럼 한 번 봤는데 기억이 안 나서 또 보는 일은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