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전 내가 예상한거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타잔이면 그냥 정글 뛰어다니는 영화 아닌가?" 하고 가볍게 틀었는데, 영화 초반부터 벨기에 식민 지배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단순한 여름 블록버스터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그 편견이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잔이라는 캐릭터, 알고 보면 100년 넘은 IP다
일반적으로 타잔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아아아아!" 소리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원작의 역사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타잔은 1912년 미국 소설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가 잡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유인원 타잔'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후 1914년 첫 단행본이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시리즈가 26권까지 이어졌고, 극장판 영화만 100편 이상, TV시리즈와 비디오를 포함하면 300편이 넘는 콘텐츠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IP(Intellectual Property)란 캐릭터, 이야기, 세계관 등 창작물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의미하는데, 100년 넘게 살아남은 IP라는 점에서 타잔은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실상 원조 슈퍼 히어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찾아보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타잔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숭이 언어로 '흰 피부'를 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잔을 기른 유인원 '칼라'는 영상 콘텐츠에서는 고릴라로 묘사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망가니'라는 허구의 유인원 종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실제 동물학적 분류와 소설 속 설정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걸 대부분 잘 모르더군요.
타잔의 밀림, 어디인지 따져보면 꽤 구체적이다
영화에서는 그냥 "아프리카 밀림"이라고만 나오는데, 이걸 실제 지리와 언어 분포로 검증해보면 꽤 흥미로운 결론이 나옵니다.
많은 시각에서는 타잔의 밀림을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 설정을 꼼꼼히 따져보면 카메룬이 더 유력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 근거로는 대서양 기니 만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고릴라 서식지, 반투어 사용권, 그리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 식민 지배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지역이라는 점 등이 꼽힙니다.
실제로 타잔은 유인원과의 의사소통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와힐리어, 반투계 언어까지 구사하는 캐릭터입니다. 여기서 스와힐리어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반투어계 공용어로, 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설정 자체가 타잔의 활동 무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런 언어적 설정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아프리카 어딘가"가 아니라 꽤 구체적인 지역을 상정한 세계관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벨기에 식민지 수탈 문제가 전면에 나온 것도 이런 지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지 통치는 역사적으로 극단적인 착취와 인권 유린으로 기록된 사례인데(출처: 위키피디아 - 콩고 자유국), 영화가 이걸 직접 건드린 부분은 여름 블록버스터치고는 꽤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타잔 배우들, 공통점이 있었다
타잔 100년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하나 보입니다. 배우 상당수가 스포츠 선수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역대 주요 타잔 배우들의 면면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1932년 조니 와이즈 뮬러: 올림픽 5금 1동의 루마니아계 미국 수영선수. 트레이드마크인 "아아아아!" 소리를 처음 낸 배우
- 1933년 버스터 크래브: 금메달·동메달 획득 수영선수 출신
- 1928년 프랭크 메릴: 미국 체조 챔피언 출신
- 1949년 렉스 바커: 축구·육상 선수 출신, 실제로도 5번 결혼한 것으로 유명
- 1955~1960년 고든 스콧: 191cm 인명구조원 출신, 체형 유지를 위해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살았다고 전해짐
- 1966~1970년 론 엘리: 만능 스포츠선수 출신으로, 타잔 소리를 워낙 잘 표현해 요들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음
여기서 캐스팅 디렉션(casting direction)이란 작품의 성격에 맞게 배우를 선발하는 기획 방향을 뜻하는데, 타잔 시리즈의 캐스팅 디렉션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실제 신체 능력을 갖춘 운동선수'를 우선시했다는 게 보입니다. 단순한 연기력보다 몸 자체가 캐릭터를 증명해야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2016년작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 타잔을 맡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역시 이 전통을 따라 촬영 전부터 극단적인 체형 만들기에 몰두했습니다. 배우로서 순수하게 근육량을 끌어올려 역할을 소화했다는 점에서, 역대 타잔 배우들의 계보에 크게 어색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자체는 어땠나, 비교해보면 아쉬움도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타잔 영화라고 하면 밝고 경쾌한 정글 모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레전드 오브 타잔은 그 기대와는 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부터 죽음의 성물까지 시리즈 후반을 연달아 맡은 감독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묵직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면에서도 단선적인 정글 탈출 구조가 아니라 회상과 현재를 교차하며 타잔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 문제를 함께 다루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끌어들이고 식민지 수탈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부분은 분명히 의미 있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를 감당할 만큼 서사가 촘촘하게 짜여 있지는 않았다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여름 블록버스터가 짊어지기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반쯤 걸쳐 놓은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아예 실망스러운 영화는 아닙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마고 로비의 조합은 화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액션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크리스토프 왈츠 특유의 냉소적인 빌런 연기도 영화의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세계 영화 흥행 데이터를 집계하는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레전드 오브 타잔은 전 세계적으로 약 3억 5천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뒀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큰 기대를 받은 대작치고는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넷플릭스에 올라온 이후에는 꾸준히 재발견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결국 레전드 오브 타잔은 "나쁘지 않은데 뭔가 아쉽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초중반의 느린 흐름이 조금 버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고비만 넘기면 후반부는 꽤 시원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타잔이라는 캐릭터의 100년 역사를 조금 알고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으니, 그냥 틀기 전에 원작 배경을 잠깐이라도 훑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