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타임 98분이 제목 그대로 24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넷플릭스 인도네시아 영화 가스퍼의 24시간을 보고 나서 든 첫 느낌이 딱 그랬습니다. 사브다 아르만디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고, 장기 밀매가 성행하는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품고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직접 겪어보니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꽤 컸습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 설정은 좋았는데
영화는 오프닝부터 디스토피아(Dystopia)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디스토피아란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억압적이고 불평등하게 퇴보한 가상의 미래를 뜻하는 개념으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 속 세상도 빈부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고 정부 방위군이 드론을 앞세워 민간인을 포위하는 장면이 등장할 만큼 공권력이 시민을 압박하는 구조입니다.
제가 이 설정에서 처음 느낀 건 "아, 이거 제대로 만들면 꽤 묵직한 사회 비판 영화가 되겠다"는 기대감이었습니다. 기술 발전이 오히려 소수의 권력자에게만 복무하고 나머지는 그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구조,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계은행(World Bank)의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소득 불평등 지수인 지니계수는 신흥국 상당수에서 악화 추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출처: 세계은행).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구축한 세계관을 영화는 끝내 제대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배경은 근 미래인데 이야기의 결은 지극히 평범한 복수극에 가깝고,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장식처럼 겉돌기만 합니다.
심장 보조 장치와 24시간, 이야기의 핵심 구조
주인공 가스퍼(레자 라하디안)는 심장 보조 장치에 결함이 생겨 수리를 받지 않으면 24시간 안에 사망한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여기서 심장 보조 장치란 심장의 펌프 기능이 약해진 환자에게 이식하는 기계 장치를 뜻하는데, 현실에서는 심실 보조 장치(VAD, Ventricular Assist Device)라고 불립니다. VAD는 심장이 혈액을 온몸으로 충분히 밀어내지 못할 때 그 역할을 대신해 주는 장치로, 심장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임시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이용해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가스퍼가 어린 시절 첫사랑이자 갑자기 사라진 키라나(소피아 쉬렌)를 찾고, 그녀를 팔아넘긴 아버지 완 알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그네스(센이나 시나몬), 킥(라우리 바수키), 엔제트(크리스토 임마누엘), 타티 부인(데위 이라완), 야디(살 프리아디) 등을 한 명 한 명 설득해 팀을 꾸리는 구조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시한부 설정이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시간 압박이 이야기 전반에 걸쳐 관객에게 체감돼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남은 시간이 24시간뿐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도 전개 속도가 상당히 느립니다. 가스퍼와 키라나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 의미 없이 길게 반복되는데, 이야기에 감정적 무게를 더하기보다는 그냥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장기 밀매 카르텔,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
완 알리의 보석상 뒤에는 어린 소녀들을 가둬놓고 장기를 적출하는 범죄 조직이 있었습니다. 장기 밀매는 국제 범죄 조직에 의해 실제로 자행되는 중범죄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INTERPOL)에 따르면 인신매매와 결합된 장기 밀매는 아시아와 동유럽을 중심으로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출처: INTERPOL).
영화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저는 봤습니다. 선한 사람도 극단적인 빈곤과 탐욕 앞에서는 짐승 같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그 피해가 가장 약한 존재인 어린 소녀들에게 집중된다는 현실. 결말에서 가스퍼가 갇혀 있던 소녀들을 전부 풀어주고 스스로는 개울가에 쓰러지며 끝나는 장면은 그나마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다만 이 주제 의식이 영화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장기 밀매 카르텔이 이야기의 중심축이어야 하는데, 영화 중반까지는 그것이 첫사랑 찾기인지 복수극인지 사회 고발인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답답했던 순간도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볼 만한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근 미래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빈부 격차 묘사
- 심장 보조 장치(VAD) 시한부 설정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긴장감
- 장기 밀매 조직과 공권력의 유착이라는 사회 비판 메시지
- 치매 기운이 살짝 엿보이는 할머니 캐릭터의 엉뚱한 유머
넷플릭스 인도네시아 영화로서의 가능성과 한계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로컬 콘텐츠의 국제 유통이 가능해진 OTT(Over-the-Top) 환경 덕분입니다. OTT란 인터넷을 통해 방송과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뜻하며, 기존 방송사나 극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콘텐츠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이 환경은 인도네시아처럼 제작비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 시장에도 기회를 열어줬습니다. 가스퍼의 24시간도 그 흐름 위에 있는 작품입니다. 제작비의 한계는 영화 곳곳에서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제작비가 적더라도 이야기의 밀도가 높으면 충분히 커버가 됩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의 밀도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점입니다.
치매 기가 슬쩍 보이는 할머니 캐릭터가 엉뚱한 농담을 던지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한국의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와 비슷한 결로 사랑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인도네시아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부분이라 이런 캐릭터를 더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말의 메시지만큼은 공감합니다. 악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 희생자는 늘 약한 쪽이라는 이야기. 그 메시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너무 버거웠다는 게 솔직한 후기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인도네시아 영화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를 기대하고 틀었다가는 후회할 수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사회 비판 메시지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권합니다.